요즘 내가 존경하는 번역가, 안정효씨의 책을 읽고 있다.
늘 이분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,
어떻게 한국인으로서 원어민들보다 더 해박한 영어지식을
갖고 있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고,
그 꼼꼼하고 깐깐함, 냉철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.
정작 이런 전문인들은 가만히 있는데,
섣부른 것들이 늘 더 소리가 시끄럽기 마련이다.
이분은 ribbon 조차 한국어 ‘댕기’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정도로,
한국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시다.
아무래도 양쪽 언어를 다 잘하시니 영어에 대한 사랑만큼이나
한국어에 대한 사랑도 깊어지셨으리라.
요즘 아무나 입에 올려 쓰는 말, ‘role-model(롤 모델)’....
아무렇지도 않게 ‘역할모델’이라고 바꿔 말하고 사는 모양인데,
이 역시 이미 우리말 ‘모범’, 또는 ‘귀감’이 있다는 말씀이다.
이미 있는 우리말 ‘모범’, ‘귀감’은 내다 버리고,
role-model이라는 영어를 억지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
우리의 모습이 참 가소롭다.
예전에 오성식이라는 분이 영어 관련방송인으로서
한 때 주가를 올리던 때가 있었다. 이 양반은
“스파게티쯤은 젓가락으로 먹을 수 있어야 한다.”
는 지론을 펼쳤었고, 나 역시 ‘그것 참 옳은 이야기다.’라고 동감했었다.
어차피 동양의 국수문화가 서양으로 넘어간 것이 스파게티이다.
하지만 서양인들은 젓가락을 사용할 줄 몰라, 이를 포크로 돌려 먹었던 것이다.
그 국수문화가 다시 돌아 동양을 찾아온 것인데,
이미 젓가락을 사용할 줄 아는 우리가
무엇 때문에 스파게티를 불편하게 포크로 돌려 먹어야 한다는 말인가?
우리에겐 훨씬 더 편리한 젓가락이 있지 않은가?
젓가락질을 할 줄 알면서도
굳이 불편하게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려먹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서
어쩐지 문화적 사대주의가 느껴진다.
“문화는 수입했지만, 기술을 수출합니다.”
라는 모 침대회사의 자부심 가득한 광고문구가 생각난다.
영어도 자동차, 인터넷, 휴대전화와 같은 도구에 불과하다.
첫째, 여러분은 휴대전화 사서 모든 기능을 다 사용하는가?
둘째, 여러분은 휴대전화 사서 모든 기능을 다 사용하지 못하면 열등감을 느끼는가?
영어는 도구일 뿐이다.
종교가 아니다.
각자 필요한 만큼만 잘하면 된다.
그다지 영어를 많이 사용하지도 않을 사람들이 다 영어를 전공해야만 하는 걸까?
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영어 때문에 열병을 앓아야 하는 걸까?
김연아, 박찬호, 싸이가 영어 인터뷰하는 것 봤을 것이다.
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표현정도 할 줄 알면 되는 것이다.
그들은 영어보다는
스케이트를 더 잘 타야하고, 야구를 더 잘해야 하고, 노래를 더 즐겁게 불러야 한다.
영어 때문에 기죽을 것이 전혀 없다.
영어전공자가 받은 토플점수 100점은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,
다른 분야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받은 토플점수 60점은 오히려 더 훌륭한 것이다.
영어전공자는 100점보다 더 큰 실력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,
비전공자는 이미 60점만으로도 자신이 쓸 만큼 한 것이다.
출퇴근만 할 거라면 굳이 고성능의 대형차를 구입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.